여러분은 돈의 단위(숫자의 크기)에 대해서 생각해보신 적 있으신가요? 환전 할 때 보면 1달러가 1,000원이 넘고, 1유로도 1,300원이 넘죠. 가만 보면 선진국으로 갈 수록 돈의 단위가 작아집니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는 돈의 단위가 유난히 큰 것 같아요. 우리나라도 나름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고 평가받고 있는데, 1달러에 네 자리의 환율은 우리 경제의 위상과 맞지 않다는 지적도 계속해서 있어왔죠.
돈의 단위가 크면 여러가지 불편한 점이 많이 있습니다. 일단 금액을 계산하는 것도 힘들어지고, 기업에서도 회계단위가 너무 커져서 장부기입할때도 불편합니다. 실제로 일상에서 이런 불편함을 해소하려는 노력을 자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새는 카페나 레스토랑에 가보면 가격표에 5,000원을 5.0으로, 25,000원을 2.5로 표시하기도 하거든요.
이처럼 우리나라의 화폐단위가 워낙 크다보니 진작부터 화폐단위를 변경하는 리디노미네이션에 대한 이야기가 지속적으로 있어왔습니다. 2019년 3월 한국은행 업무보고에서는 이주열 총재가 직접 리디노미네이션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었죠. 우리나라는 과연 리디노미네이션을 실시하게 될까요? 오늘 다룰 내용은 바로 리디노미네이션 입니다.
리디노미네이션이란?
· 리디노미네이션(Redenomination)
우리나라말로 '화폐단위 변경'이란 뜻으로, 한 나라에서 통용되는 화폐의 단위를 100분의 1, 1000분의 1 등으로 바꾸는 것을 뜻함. 즉, '0'들을 떼어낸다는 뜻임. 다양한 화폐개혁 방식 중 하나임.
영어사전에는 디노미네이션(Denomination)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의 뜻은 '한 국가 내에서 통용되는 모든 화폐의 액면금액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여기에는 채권이나 주식의 액면가도 모두 포함됩니다. 즉, 디노미네이션은 '화폐단위'를 뜻하는 용어입니다. 이 용어 앞에 '다시'라는 뜻의 접두어 Re-가 붙은 단어가 바로 오늘 공부할 내용인 리디노미네이션인데요, 용어의 뜻을 제대로 모르시더라도 대충 어감상 '화폐단위를 다시 ~하는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겠죠? 맞습니다. 리디노미네이션이란 '화폐단위 변경'이라는 뜻으로, 구매력이 다른 새로운 화폐단위를 만들어 현재의 화폐단위와 일정한 교환비율로 교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설명이 좀 어렵나요? 예를 들면 여태 우리가 사용했던 '원' 단위를 '환' 단위로 바꾸는 것을 생각해보면 됩니다.
· 리디노미네이션의 쉬운 예시
- 기존에 우리가 사용했던 '원'단위 화폐 대신 새로운 '환'단위의 화폐를 발행
- 1,000원 = 1환 비율로 화폐를 교환(=1,000대 1로 화폐단위를 낮춤)
위처럼 국가의 화폐단위를 변경하는 행위를 리디노미네이션이라고 부릅니다. 일반적으로는 화폐의 이름을 변경하면서 화폐의 단위도 낮추게 됩니다. 이게 무슨말인가 하면, 새로 바뀌는 화폐단위는 기존화폐보다 자릿수가 낮아진다는 뜻입니다. 기껏 새로운 화폐를 도입하는데 1,000원을 100만환으로 바꾼다면 '0'이 더 많아져서 복잡해지겠죠? 화폐의 단위를 낮추는 이유는 리디노미네이션의 이유를 통해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리디노미네이션을 하는 이유가 무엇무엇이 있는지 한번 살펴볼까요?
리디노미네이션을 하는 대표적인 이유 3가지
1. 인플레이션이 지속되어 화폐의 구매력이 감소
리디노미네이션의 가장 대표적인 이유는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화폐의 구매력 감소입니다. 여기서 구매력(Purchasing Power)이란 쉽게 말해서 화폐가치를 의미합니다. 과거 1990년대에는 1,000원 한장으로 자장면 1그릇을 먹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30년이 지난 요즘에는 1,000원으로 자장면이 아니라 짜파게티 1봉지만 겨우 사먹을 수 있죠. 이처럼 물가가 상승하면 상대적으로 화폐가치가 떨어져, 같은 돈으로 물건을 구매하는 힘(=구매력)이 감소하게 됩니다.
아마 이처럼 화폐의 구매력이 지속적으로 감소한다면, 언젠가 자장면 한그릇이 100만원이 될 날이 오겠죠? 그런 상황이 온다면 간단한 물건 하나 사는데도 화폐로 표현하는 숫자가 많아지기 때문에, 계산할 때나 회계장부 작성시 상당히 불편해질 겁니다. 이런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리디노미네이션을 시행하게 되는 것이죠.
특히 극단적으로 물가가 상승하는 하이퍼인플레이션 발생시에 리디노미네이션을 통해 물가안정을 도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2000년대에 이르러 급격한 물가상승(=하이퍼인플레이션)이 발생했던 짐바브웨는 수차례에 걸쳐서 리디노미네이션을 실시하기도 했습니다.
· 짐바브웨의 리디노미네이션 사례
- 1차 화폐개혁(2006년 8월) : 1,000 ZWD → 1 ZWN 으로 리디노미네이션
- 2차 화폐개혁(2008년 8월) : 100억 ZWN → 1 ZWR 으로 리디노미네이션
- 3차 화폐개혁(2009년 2월) : 1조 ZWR → 1 ZWL 으로 리디노미네이션
짐바브웨가 이렇게 많이 리디노미네이션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화폐의 구매력이 매우 빠른 속도로 감소했기 때문입니다. 작년의 자장면 한그릇 값이 5,000원이었는데, 올해 자장면 한그릇 값이 5,000조원으로 오른 셈이니까요. 자장면 한그릇 먹자고 리어카에 돈다발을 가득 담아서 거래를 해야하는 상황이 발생해버리니, 결국 돈이 제 구실을 못하게 된 것이죠.
2. 화폐 단위를 10진법으로 변경
화폐 단위가 매우 복잡한 경우에도 리디노미네이션을 실시하기도 합니다. 과거 영국은 오랫동안 파운드, 실링, 기니, 크라운 등의 다양한 화폐 단위를 같이 사용했습니다.
· 영국의 리디노미네이션 이전 화폐단위(1971년 이전)
- 1파운드 = 4크라운
- 1크라운 = 5실링
- 1실링 = 12펜스
- 1기니 = 21실링
화폐 단위가 너무 많을 뿐더러 10진법으로 딱 떨어지지 않고 4진법, 5진법, 12진법, 심지어 21진법까지 혼용하다보니 당시 국민들은 돈을 계산하기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영국은 1971년에 화폐개혁을 단행하여 위와 같은 복잡한 화폐단위를 모두 없애고, 파운드와 펜스 단위만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복잡한 진법들도 모두 없애고 10진법으로만 화폐단위를 표기하도록 하였죠. (마치 미국 1달러 = 100센트와 같이 말이죠)
· 영국의 리디노미네이션 이후 화폐단위(1971년 이후)
- 1파운드 = 100펜스
3. 국가간 화폐단위 통합
과거 유럽 내의 국가들은 모두 각자만의 고유한 화폐를 사용했었으나, 유럽연합(EU) 출범 이후 유럽의 경제통합을 위해 EU 회원국들간에 '유로화(€)'라는 단일화폐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참고로 모든 EU 회원국이 유로화를 사용하는 것은 아니며, 28개국의 EU 회원국 중 19개국[비 EU 회원국 포함 23개국]이 유로화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유로화를 사용하는 국가들을 통칭하여 유로존이라고 합니다.)
각 국의 화폐를 유로화로 통합하는 과정에서 각 국의 화폐들은 유럽중앙은행이 정한 비율대로 리디노미네이션 되었습니다. (표 출처 : 위키백과)
국가 |
도입이전 화폐단위 |
유로화 교환비율 (1€당) |
유로화 도입연도 |
---|---|---|---|
벨기에 | 벨기에 프랑 | 40.3399 | 1999년 |
룩셈부르크 | 룩셈부르크 프랑 | 40.3399 | 1999년 |
독일 | 마르크 | 1.95583 | 1999년 |
스페인, 안도라 | 페세타 | 166.386 | 1999년 |
프랑스, 모나코, 안도라 | 프랑스 프랑 | 6.55957 | 1999년 |
아일랜드 | 파운드 | 0.787564 | 1999년 |
이탈리아, 산마리노, 바티칸 | 리라 | 1936.27 | 1999년 |
네덜란드 | 휠더 | 2.20371 | 1999년 |
오스트리아 | 실링 | 13.7603 | 1999년 |
포르투갈 | 이스쿠두 | 200.482 | 1999년 |
핀란드 | 마르카 | 5.94573 | 1999년 |
그리스 | 드라흐미 | 340.75 | 2001년 |
슬로베니아 | 톨라르 | 239.64 | 2007년 |
키프로스 | 키프로스 파운드 | 0.585274 | 2008년 |
몰타 | 몰타 리라 | 0.4293 | 2008년 |
슬로바키아 | 코루나 | 30.126 | 2009년 |
에스토니아 | 크론 | 15.6466 | 2011년 |
라트비아 | 라츠 | 0.702804 | 2014년 |
리투아니아 | 리타스 | 3.4528 | 2015년 |
4. 그 밖의 기타 이유들
위의 3가지 이유 외에도 다양한 요인들로 인해 리디노미네이션을 실시하기도 합니다. 자국 통화의 대외적 위상을 높일 목적으로 실시되기도 하며, 지하경제를 양성화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실시되기도 하죠. 정치적인 목적으로 화폐개혁을 실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1950년, 1953년, 1962년에 각각 화폐개혁을 실시한 사례가 있습니다. (참고로, 제1차긴급통화조치는 화폐단위가 변경된 사례는 아니므로 리디노미네이션이라고 볼 순 없습니다.)
· 제1차긴급통화조치 (1950년)
- 원인 :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이 당시 법정화폐인 조선은행권을 약탈, 남발함. 이러한 북한의 통화공작을 차단하기 위해 화폐개혁 실시.
- 결과 : 한국은행을 신설하고, 한국은행이 (구)조선은행권을 회수하고 (신)한국은행권을 발행.
· 제2차긴급통화조치 (1953년)
- 원인 : 한국전쟁 과정에서 남발된 통화와 그에 따른 인플레이션을 수습하기 위해 리디노미네이션 실시.
- 결과 : 화폐단위를 원화(圓)에서 환화로 바꾸고, 기존 100원(圓) → 1환으로 교환 실시
· 제3차긴급통화조치 (1962년)
- 원인 : 5·16 군사정변으로 등장한 군사정부가 재정적자 확대로 누적된 과잉유동성을 해소하고 부정축재자가 은닉하고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퇴장자금(지하자금)을 끌어내기 위함.
- 결과 : 화폐단위를 환화에서 원화(\)로 바꾸고, 기존 10환 → 1원(\)으로 교환 실시
리디노미네이션의 경제적 영향(장단점) 정리
앞서 서론에서 언급드렸다시피, 우리나라도 리디노미네이션을 실시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종종 나오고 있습니다. 물론 지금 당장은 실시하지 않겠지만, 우리나라의 경제가 계속 성장한다면 언젠간 분명히 리디노미네이션을 실시해야 할 날이 올 것입니다. 실제로 화폐단위를 변경한다면 국가경제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까요?
· 리디노미네이션의 경제적 영향
- 이론적으로 경제의 실질변수(소득, 물가, 환율 등)가 변하진 않음.(단지 표기법만 달라짐)
-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수 있음.
- 화폐단위 변경에 따른 불확실성 확대로 실물자산(부동산 등)에 대한 수요가 높아질 수 있음.
- 결제시스템에 대한 새로운 교체수요가 발생하여 경기부양을 일으킬 수 있음. 그러나, 만약 새로운 결제시스템을 제대로 구축하지 못하면 큰 사회적 혼란을 야기할 수 있음.
- 지하경제의 양성화를 도모할 수 있음.
리디노미네이션은 화폐 단위에서 '0'만 떼어내는 것이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경제변수에 영향을 끼치진 않습니다. 단지 경제변수의 표기법만 달라질 뿐이죠. 그러나 실제로 리디노미네이션을 시행했던 국가들의 사례를 종합해보면 알게모르게 국가경제에 전반적으로 영향을 끼쳤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화폐단위 변경에 대해서는 긍정과 부정이 엇갈립니다. 먼저 인플레이션 우려입니다. 예를 들어 부동산 가격이 9억원 이었는데, 1,000 대 1 리디노미네이션으로 인해 90만환으로 바뀐다고 가정해볼게요. 사람들은 9억에서 10억으로 상승하는 것에 대해서는 심리적인 부담감을 크게 느끼지만, 90만에서 100만으로 상승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부담을 덜 느낍니다. 화폐단위 변경 이전에는 10만이라는 단위가 그리 큰 단위는 아니었기 때문이죠. 이처럼 심리적인 요인으로 인해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우려가 존재합니다. (아래 '더보기'를 클릭하시면 심화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앞서 초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리디노미네이션을 실시한다고 했는데, 리디노미네이션을 실시하면 인플레이션이 더 생길 수 있다는 건 모순이 아닐까요? 사실 초인플레이션은 리디노미네이션만으로 억제되지는 않습니다. 과거 초인플레이션을 겪었던 국가들은 리디노미네이션과 함께 국가가 재정지출을 줄이는 재정개혁과 통화량을 억제하는 정책을 같이 시행했기 때문에 초인플레이션을 억제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만약 이들이 리디노미네이션만 실시하고 재정개혁과 통화팽창을 줄이는 화폐개혁을 실시하지 않았다면 초인플레이션을 잡을 수 없었을 겁니다.
추가로, 리디노미네이션으로 인해 인플레이션이 발생한다는 주장 자체에 대한 반론도 존재합니다. 앞서 부동산의 가격이 9억에서 90만환으로 바뀌어 구매심리가 바뀐다고 설명을 드렸죠? 그런데 역으로 생각해보면 우리의 월급도 300만원에서 3천환으로 바뀌기 때문에, 사람들은 본인의 소득이 갑자기 확 줄었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내 월급이 줄었다고 생각이 들면 지출을 줄이려고 할 것이고, 결론적으로 재화의 가격 단위변경 효과와 소득의 단위변경 효과가 상쇄되는 것이죠.
둘째로 실물자산의 수요증가로 인한 불확실성 확대입니다. 화폐단위를 변경하면 화폐가치의 불확실성 확대로 자연스레 실물자산의 수요가 증가합니다. 이에 따라 자칫 안정세를 찾아가는 부동산 시장이 다시 불안해질 수도 있습니다.
셋째로 새로운 교체수요로 인한 경기부양 효과입니다. 화폐단위를 변경한다면 기존의 전자결제시스템이 새로운 시스템으로 변경되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여 경기부양 효과를 노릴 수도 있죠. 그러나 이 과정에서 새로운 결제시스템의 도입에 문제가 발생한다면 국가 전체적으로 큰 혼란을 야기시킬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지하경제의 양성화를 도모할 수 있습니다. 기존의 화폐를 새 화폐로 교환하지 않으면 종이쪼가리가 되기 때문에, 감추고 있던 은닉자금을 은행에서 교환해야만 하겠죠? 이 과정에서 지하경제를 양성화시키고 추가 세수를 기대할 수도 있겠습니다.
마치며
리디노미네이션에 대해 조사해보니 생각보다 많은 국가들이 이를 단행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투자증권의 리포트에 따르면, 1980년 이후 전세계 각국이 리디노미네이션을 단행한 횟수가 68건에 달한다고 합니다. 이는 국가의 경제가 커지면 리디노미네이션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례라고도 볼 수 있겠네요.
리디노미네이션이 성공적으로 정착하려면 모든 절차가 완벽하게, 그리고 투명하게 진행되어야만 합니다. 제 생각에는 우리나라도 언젠가는 리디노미네이션이 시행될 것 같습니다. 언젠가는 해야만 하는 과정이니만큼, 이에 대한 논의가 충분히 이뤄지고 점진적으로 시행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